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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

회양목의 진한 향기가 사라진 어느 봄 날

맑은향기greeneco 2026. 3. 24.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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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양목 꽃은 피었는데 향기가 머물다 간 자리만 남았습니다. 
이미 지나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그냥 

향기가 나길 기다리며 연두색 꽃송이만 쳐다봅니다. 

 

언제나 그렇듯 화려하지도 않게 

그 꽃의 향기는 진하게 왔다가

아! 좋다고 느끼는 순간 두 번을 맡을 수 없습니다. 

 

진한 단맛의 향기로 

내 코는 많은 여운을 가지며

하루를 지납니다. 

 

흔하지만 흔하지 않게 

강한 향기를 지닌 회양목은

봄의 향기를 주고, 봄바람에 사라집니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강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나의 향기를 뿌리고

가고 싶습니다. 

 

학명은 Buxus koreana( Buxus microphylla var. koreana Nakai ex Chung & al. )이고, 영어로는 Korean boxwood라고 한다. 지금은 북한 지역인 강원도 회양이라는 곳에서 많이 자라서 이름이 '회양목'이 되었다. 열매를 싸고 있는 껍질이 부엉이를 닮아 ' 부엉이 나무', 나무가 도장으로 많이 만들어 진다고 하여 ' 도장 나무'라고도 한다. 꽃말은 '금욕, 금기', '인내', '참고 견뎌냄'이다.

 

1.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봄의 소식

 

봄은 아무도 모르게 발끝에서부터 살금살금 다가오지요.

사람들은 대개 화려한 벚꽃이나 목련의 커다란 꽃잎에 마음을 뺏기기 일쑤지만, 사실 우리 곁에 가장 먼저 도착해 우리 발치 아래에 있습니다.어느 집 마당가나 아파트 단지 화단, 길가 어디에나 흔하게 심겨 있는 회양목이 바로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그저 초록색 잎을 빽빽하게 매달고 있습니다.  '도장나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자라는 속도가 워낙 더뎌서, 사람의 손길을 묵묵히 견디며 제 자리를 지킬 뿐이지요. 꽃을 피우는 순간, 세상은 놀랄 만큼 달콤해집니다. 회양목 꽃은 아주 작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꽃이 피었는지조차 알기 어려울 만큼 수줍은 연두색 혹은 노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지요. 그런데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얼마나 진하고 깊은지 모릅니다. 마치 꿀통을 통째로 쏟아놓은 듯한 그 달콤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닿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아, 봄이 깊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향기가 달다고 먹지는 마세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독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2. 사라진 것들이 남긴 빈자리

 

올봄은 조금 다르게 왔습니다. 꽃은 있는데 코를 가까이 해도 진한 향기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제가 일찍 만나지 못한 걸까요. 아니면 부끄러워 먼지 지나갔을까요. 아니, 어쩌면 제가 너무 바삐 사느라 그 향기가 머물다 간 찰나의 순간을 놓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아침마다 들려오던 새소리, 창가에 비치던 부드러운 햇살,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다정한 안부 같은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기적 같은 선물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늘 그것이 사라진 뒤의 일입니다.

향기가 사라진 봄날, 저는 가만히 회양목 앞에 멈춰 섭니다. 꽃은 지고 없지만, 나무는 여전히 초록색 잎을 반짝이며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향기가 없다고 해서 나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향기가 없다고 해서 봄이 멈춘 것도 아닙니다. 다만 향기는 이제 나무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 내년 봄에 다시 내보낼 더 깊은 달콤함을 준비하고 있겠지요.

 

 

3.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나태주 시인의 시 구절처럼, 회양목이야말로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꽃이 피어 향기를 내뿜을 때만 귀한 것이 아니라, 향기가 사라진 뒤에도 묵묵히 먼지를 뒤집어쓰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자기 몸을 꺾여도 그 곳을 지키는 그 인내의 시간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누구나 인생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진한 향기를 내뿜는 순간, 남들의 박수를 받고, 스스로도 자신이 대견해 보이는 날도 있지만, 인생의 대부분은 향기가 사라진 뒤의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집니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 반복되는 업무, 그저 그런 산책길입니다.

꽃 향기는 바람에 쉽게 날아가 버리지만, 나무의 줄기가 굵어지는 것은 향기가 사라진 뒤의 고요한 시간 속이 있고, 이 속에서 나는 더 성숙할 수 있을테니까요.

 

 

4. 당신이라는 향기

 

오늘 저는 회양목 향기가 없는 꽃을 바라보며 문득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은 제 인생의 회양목 같은 사람입니다. 큰 소리로 저를 부르지도 않고, 화려한 옷을 입고 앞장서지도 않지만, 늘 제가 걷는 길, 함께 지금까지 있습니다. 가끔 제가 당신의 소중함을 잊고 무심하게 지나칠 때도, 당신은 그저 묵묵히 초록색 잎을 틔웁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힘들고 지칠 때, 당신은  따스한 향기를 주고, 나를 살리게 합니다. 그 향기가 저를 살게 했고, 다시 걸어갈 힘을 주었습니다.설령 지금 우리 사이의 향기가 예전처럼 진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뜨겁던 감정이 가라앉고, 가슴 설레던 말들이 줄어들었더라도 오히려 그것은 당신의 향기가 '나에게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코로 맡는 진한 향기가 아니라 이미 내 몸속에, 내 영혼 속에 당신이라는 사람의 향기를 함께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5. 다시, 봄을 기다리며

 

회양목의 진한 향기가 사라진 봄날은 결코 슬픈 날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준비이며, 더 푸른 여름을 맞이하기 위한 인사입니다. 향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제 햇살이 내려앉고, 빗물이 고이고, 바람이 머물다 갈 것입니다. 향기 대신 단단한 잎사귀를 가만히 만져봅니다. 비록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함은 없지만, 손바닥에 전해지는 잎사귀의 팽팽한 생명력이 기분 좋습니다. 내년 봄, 다시 회양목의 진햔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거니까 말입니다. 그동안 나의 자리를 지키며, 그 향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오늘도 길가에 핀 작은 풀꽃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이미 충분히 향기롭습니다.

 

봄은 가도, 사랑은 남습니다. 향기는 흩어져도, 우리는 여전히 여기 함께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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