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나는 광릉 숲을 걷는다.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공기는 맑고 차다.
숨을 깊이 들이마실 때마다 콧속 깊은 곳까지 푸른 향이 스며든다.
전나무와 활엽수가 함께 빚어내는 이 숲의 냄새는, 마치 오래된 시간의 숨결 같다.
수백 년을 이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이 조용히 안부를 건네는 듯하다.
포근하게 깔린 흙길 위로 내 발자국이 차례대로 찍힌다.
흩어진 눈과 흙이 함께 섞이며 만들어내는 색이 묘하게 따뜻하다.
도시의 인도 위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살아 있는 길의 온기다.
나는 오늘도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이 길 위에 서 있다.
급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숲의 속도에 나를 맞춰보기로 한다.

길 끝자락에는 붉은 기둥의 문이 서 있다.
홍살문 너머로 보이는 전각은 이 숲의 오랜 시간을 상징하는 얼굴 같다.
나는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세속의 시간과 숲의 시간이 갈라지는 경계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문을 지나기 전과 후, 무엇이 달라질까.
아마도 세상은 그대로겠지만, 이 길을 지나간 내 마음은 조금은 다르게 숨 쉬게 되겠지.
숲은 말없이 가르친다. 모든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부터, 아주 천천히 시작된다는 것을.

바닥을 덮은 낙엽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바스락거리는 그 잎들은 겉보기에는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음 해의 숲을 준비하는 조용한 토양이 된다.
나의 지난 시간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지나가버린 계절, 끝나버린 관계, 실패라고 이름 붙였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흙이 되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숲은 나에게 묻는다.
“너는 네 낙엽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니?”
나는 마음속에서 한참이나 대답을 고른다.
부끄럽고 아픈 기억까지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늘을 내어주는 나무의 몸통이 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고 조심스레 말해본다.

얼마쯤 더 걸어가자 나무를 깎아 만든 긴 벤치가 보인다.
나는 그 위에 조용히 앉는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며 작은 소리를 만든다.
먼 곳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들려온다.
이 모든 풍경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긴 숨처럼 느껴진다.
벤치 위에서 나는 오늘의 나에게 편지를 쓴다.
“너는 지금 괜찮은가. 너무 서두르고 있지는 않은가.
조금 늦어도 좋으니,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기를.
” 답장은 오지 않지만, 숲이 대신 대답해주는 것 같다.
나무의 몸통을 타고 내려오는 햇살이 내 어깨 위에 가만히 머무른다.
광릉을 거니는 이 시간은 거창한 여행이 아니다.
그저 조금 느리게 걷고, 내 안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연습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연습들이 쌓여, 언젠가 삶이 버거워졌을 때 나를 지켜줄 숲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믿으며 오늘의 숲을 마음에 고이 접어 넣는다.
언젠가 지치고 길을 잃은 날이 오더라도, 이 흙길의 감촉과 나무 향기, 차가운 공기의 맛을 떠올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기억이 다시 나를 광릉의 한가운데로, 이 고요한 숲의 품으로 이끌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